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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은 그가 쓰는 신비한 힘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 오……! 하는 말밖에 내뱉지 못하면서, 그를 바라보는 눈에는 넘쳐흐를 만큼의 수많은 말들을 꾸역꾸역 담아냈다. 반들거리는 금빛 의자의 손잡이 위, 힘없이 늙은 손이 바들바들 떨리었다. 감히 자신의 앞에서 저토록 태연한 이질적인 존재를 어떻게든 붙잡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아내는 눈치였다.
“폐하, 내기를 하나 할까요?”
키스 C. 해밀턴은 저 탐욕스런 속내를 맞춰주면서 자신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을 기다렸다는 듯 꺼내었다. 아마 저 지저분한 늙은이의 시선에서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났으면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 내기? 내기라니, 무슨 내기 말이냐?”
국왕의 몸이 휙, 앞으로 튀어나가듯 기울었다.
“제가 이 곳에 온 이유가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거든요. 그것을 먼저 찾는 사람이 이기는 내기입니다.”
“… 그 찾는 게 뭐지?”
“… …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사내아이입니다.”
국왕의 몸이 다시 의자의 등받이로 움직였다.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냐는 의아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아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데려올 수 있다. 이것이 정녕 내기란 말이냐?”
“하하, 설마요. 제가 원하는 아이는 세상에 단 한 명뿐입니다. 금발에 파란 눈 이기만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꼭 그 아이여야 합니다.”
“흐흠, 어이가 없군. 자네가 원하는 걸 내가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이냐.”
국왕이 퍽 빈정 상한 투로 말했다.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아이는 저보다 더 기묘한 일들을 할 수 있거든요.”
도통 영문을 모르겠단 국왕을 빤히 보던 키스의 시선이 잠시 아래를 향하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 사실, 부끄럽지만 저도 그 아이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목소리였는지 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거든요. … … 내기를 하기 전에, 이곳에 학교를 하나 새울까합니다. 저와 같은 힘을 쓸 수 있는 아이들을 길러내는 학교 말입니다. 폐하께는 전혀 나쁘지 않은 얘기라고 생각합니다만.”
“… 그래서?”
“쓸만한 선생을 셋 정도 만들어두고 저는 이 나라 어딘가로 사라져 아이를 찾을 겁니다. 아이는 아마, 마법을 쓰는 것이 가능하겠죠. 먼저 찾아내신다면, 국왕께서 원하시는 걸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내기였다. 거기다 내기를 하기 전, 이 신비한 힘을 가르쳐줄 선생을 만들어둔다니, 손해볼 것 하나 없다는 계산이지만, 왕은 지나치게 솔깃한 내기의 어딘가가 탐탁지 않았는지 눈을 가늘게 뜬 채 키스를 쳐다보았다.
“… 제가 이긴다면, 이 나라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과 아이를 데리고 사라질 겁니다.”
“… 가치 있는 것이라니?”
“그건 지금 말씀드리긴 좀… 어렵네요. 가치라는 건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이라.”
“… … 내기를 한다 한들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은데….”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한동안, 국왕께서는 지금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실 테니까요.”
“그, 그게 정말인가?!”
“네.”
“기한, 기한은 언제까지지?”
“100년입니다.”
국왕이 놀란 얼굴로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잠시간 생각을 마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하겠네, 내기.”
“…좋습니다.”
만족스럽단 미소였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미소에 비해 그의 새파란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 ◆
벨로나 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에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특이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사물을 손대지 않고 움직이게 하거나 짧은 막대기 끝에서 신기한 빛이나 힘이 나오게 하는 걸 가르치는 왕립마법학교였다. 이 학교는 또 특이한 것이, 옆 나라에 엘드리나만 하더라도 크게 특이하진 않지만 특별한 학교라 함은 귀한분의 자제들만, 그것도 국왕이 직접 엄선하여 입학 허가를 따로 내어주는 것에 반해 이 특이한 학교는 신분이며 힘, 그런 것이라곤 아무런 상관이 없이 19세 이하에 금발인 파란 눈의 남자아이라면 무조건 입학이 가능하다는 것 이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존재가 왕국의 위엄을 지탱하는 부분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라, 백성들 사이에선 머리색과 눈 색으로 은연중 차별을 두는 일 또한 흔하게 일어났다.
‘타고나길 잘 타고 난다’ 라는 말이, 어느새 신분의 이야기가 아니라 눈과 머리의 색으로 변한지 몇십년이 지나고, ‘타고나길 잘 타고난’ 사내아이 한명이 이 학교에 입학했다. 아이는 나랏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저명한 소설가의 아들로, 연한 갈빛이 섞인 금발과 라벤더 빛이 도는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부도 남부럽지않게 넉넉하고, 어머니를 따라 남 못지 않은 신분 또한 물려받은 아이였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동경과 선망을 담은 눈으로 아이를 보았는데, 정작 화두의 대상인 아이는 자신이 가진 것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이 보였다. 특별히 성격이 모나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나 항상 아래를 보는 아이의 시선과 다정한 듯 무심한 대답들 때문인지 '어딘가 싸한 구석이 있다'는 말을 붙이고 다니는 아이를 가까이 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아이가 14살이 되던 해, 학교에 입학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들었어? 학교에 있는 유령에 관한 얘기! 어젯밤에도 나왔대!”
“라셀이랑 베니가 봤다며?”
“유령은 무슨 유령이야? 애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야, 우리 애거든? 그래서? 어디서 봤대?”
“기숙사 복도. 걔들, 몰래 술집에 가려고 했다나봐.”
“아하하! 미친 거 아냐?”
아이들이 서로를 보며 조잘거릴 때에도 아이는 가만 앉아있는 게 다였다. 학교에 입학한지 두어달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익히 서로에 대해 건너 건너 알고있던 아이들 중 아무도 아이에게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아이 또한 그랬다. 한 공간이지만 책상 몇 개를 사이에 두고 동떨어진 공간처럼 느껴지는 이질감이 불편했는지, 아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교는 왕궁 내 일부를 공유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이곳저곳에 나라에 관련된 글이며 책, 평범한 소설까지 없는 책이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량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 왕궁 지하 제 2도서관이었는데, 아이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이 딱 거기인 듯 했다.
소리없이 교실을 나서는 발걸음은 유난히 크게 들리었다. 조잘거리단 아이들이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 말을 멈추고 문밖을 나서는 아이를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 그러고 보니까 나 저번에도 유령얘기 들었어.”
“어? 진짜? 언제?”
“한 삼일 전에. …거기서도 나왔다더라.”
“거기?”
“왕궁 지하 도서관. …거기서 봤다는 애들이 제일 많아.”
왕궁의 지하는 넓은 면적 때문인지 지하인데도 비해 습하거나 답답한 감이 없었다. 조용하고, 먼지가 조금 많고… 책들이 보관되다 못해 쌓여 널브러져있는 이곳이 아이는 왁자지껄한 교실보다 편안하다 생각했다. 항상 같은 모습으로…
“… 어?”
…같은 모습으로, 책의 기울기 한번 바뀌지 않는 곳인데, 도서관을 들어가는 커다랗고 화려한 문 오른편에서 가장 가까운 책장에 못보던 그림자가 하나 끼어있었다. 아이의 눈높이 보다 조금 높은 칸이었다. 지나가는 책장의 너른 빈틈 안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이는 잠시 그 앞에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끝내 결심이 섰는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빈틈 안에 보이는 것을 꺼내었다.
“… 헝겁 인형? …이건,”
손에 잡힌 건 한쪽이 딱딱하기도 하고, 또 폭신하기도 했다. 꺼내어 확인해보니, 아이의 손에 들린 건 작고 낡은 수첩하나를 안고 있는, 헝겊으로 만든 솜인형이었다.
“… 전엔, 없던 것 같은데…”
아이는 인형을 빤히 보았다. 까만 실의 머리와 푸른 청색 단추가 눈으로 달려있는 어딘가 이질적인 옷을 입은 이 인형을 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댕, 댕, 댕
아이가 화들짝 놀라 위를 쳐다보았다. 오후수업을 알리는 종이 친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손에 인형과 수첩을 들고 있다는 것도 잊고 서둘러 교실로 올라갔다.
◆ ◆ ◆
"… 4736번 학생, 늦었군요."
아이가 조심히 문을 열었을 때, 꽉 찬 교실 안은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끝이 희게 샌 머리카락을 단 한가닥도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높게 묶은 미스 메이드린이 한손에 낡은 나무지팡이를 쥐고 자신의 손바닥을 탁, 탁, 소리나게 치면서 아주 작은 힘이라도 찾아내려는 깐깐한 눈으로 아이를 훑어보았다.
"… 죄…송합니다, 미스 메이드린."
"어딜갔다 이제야 들어온거지요?"
탁, 소리가 멈추었다. 자신의 지팡이를 꽉 잡아쥔 그녀가 작은 눈을 더 가늘게 뜨고 물었다.
"…지하… 도서관에… 잠시, 들렀ㄴ…"
"그 지저분한 인형은 뭔가요?"
미스 메이드린이 아이의 말을 툭 자르곤 턱짓으로 인형을 가리켰다.
"애도 아니고 인형이라니, 그것도 국왕폐하의 은총아래 공부한다는 이가 말입니다! … 저는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군요."
"……."
미스 메이드린은 기다렸다는 듯 아이를 쏘아붙였다. 허나 아이는 원래 자기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품에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자신의 발밑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표정을 한껏 찡그리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금세 웃으며 자신의 말이 끝날 때마다 한걸음, 한걸음, 아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버리세요. 지금이라도 그 지저분한 인형을 쓰레기통에 쳐박는다면, 별다른 조치 없이 넘어가도록 하지요."
"싫… 습니다."
"…지금, 뭐라구요?"
"… … 그러고 싶지 않…다고…말씀, 드렸…습니다."
세상에. 누군가가 소리내어 얘기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이가, 수업에 늦은 걸로도 모자라 깐깐하고 집요하기로 유명한 미스 메이드린에게 대들다니.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평생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저 인형하나를 주워오는 걸로도 모자라 그걸 빌미로 반항이라… 아이들이 한명 두명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쟤 진짜 대단하다. 이상한데 대단해! 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미스 메이드린의 얼굴 또한 점점 붉어졌다. 나무지팡이를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부들거리는 손까지 얼굴 못지 않게 새빨갛게 변하고 있었다.
"473… 아니, 샤이 드 엘론!!!"
지팡이를 고쳐쥐며, 그녀가 소리를 지르듯 아이의 '왕명'을 불렀다. 조금만 늦었어도 지팡이가 똑 하고 부러질 뻔 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그렇지요?"
퉁명스러운 어투였다. 애써 진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가 아직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아이를 거칠게 벽으로 떠밀었다. 그 바람에 아이가 안고 있던 인형과 수첩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본보기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지요. 다음에도, 또, 이런 몰상식한 일이 있어선, 안 되니까요. … … 그리고 마침, 제 손에는 아주 알맞은 것이 들려있는 듯, 싶네요."
미스 메이들린이 탁, 탁, 지팡이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리치며 천천히 반복된 소리를 내었다. 아이의 한쪽 어깨를 잡아 돌린 그녀가 멋대로 아이의 스타킹을 잡아내리고는 희고 가느다란 다리를 향해 지팡이 쥔 손을 높게 들어올려 휙, 바람소리가 들리도록 세게 휘두르는데
"아, 아니, 이 이 이게 왜…!"
떨고있던 아이가 질끈 감은 눈을 조심스레, 아주 찬찬히 떠보았다. 바람소리가 바로 근처까지 닿았는데 다리엔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슬쩍 뒤를 돌아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자신의 종아리 바로 앞에서 그대로 멈춰버린 지팡이가 바람에 휘어진 모양 그대로 공중에 굳어서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그걸 떼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미스 메이들린이 어구구!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나자빠지자, 우지직-, 불안한 소릴 내던 지팡이가 반으로 두동강 나면서 똑 부러지더니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이들은 너도나도 일어서서 그 기묘한 일을 바라보다가 미스 메이드린의 뒤집어진 겉치마를 보고 배를 움켜쥐고 너도나도 소리내 웃기 시작했다. 정작 아이는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벽을 따라 미끄러지듯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이, 이…!"
미스 메이드린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아이를 죽일듯 노려보더니 얼른 부러진 지팡이를 움켜쥐고 교실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이들은 치마까지 펄럭이며 도망치는 그녀를 보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중 어깨까지 오는 단발에 밝은 금발을 가진 베니가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덕분에 진짜 재밌었다. 난 베니야. 그래도 여기 들어온지 반년이 되어가는데 이름 정돈 알고 있지?"
"… … ."
아이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형은 뭐야? 너랑 지내면서 처음 본 물건인데… 어디서 났어?"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며 베니를 쳐다본 아이는 대답은 하지않고 천천히 인형과 수첩을 품안에 넣었다. 방금 전까지 들떠있던 분위기가 단숨에 식어서, 주변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처럼 싸늘하게 조용해졌다.
"… 저기, 나 팔 아픈데. 좀 잡지 그래? 김에 대답도 해주면 좋고."
"제가 꼭… 그래야 하나요?"
아이가 담담히 얘기했다.
"내가 호의를 베풀었잖아. 고맙다는 말정도는 해야지, 샤이?"
베니가 내민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더니 손을 거두었다.
"미안… 하지만… 손 잡는 걸, 싫어…해서… 대답은, … 하고싶지, 않아서…요."
"뭐?!"
갑자기 아이 한명이 둘 사이를 비집고 끼어들더니 허리에 손을 얹고 큰소리를 쳐댔다.
"와, 너 웃긴다. 베니가 기껏 말까지 걸어줬는데 무슨 대답이 그러냐?! 학교에 있으나 없으나 한 유령 같은 게!!"
"그래! 얼른 베니한테 사과해!"
아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업 전과 다른 게 있다면, 꼭 붙잡을 것이 있어서 떨리는 손을 감출수 있다는 점이었다.
"… 제가, 사과하지 않는… 이,유를… 더 잘 알지 않나요?"
주변을 둘러보던 아이의 시선이 베니 앞에서 멈췄다. 아이는 간단 목례 후, 내려간 스타킹을 마저 올리지도 않고 언제나 향하던 곳으로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멀어지는 교실은 기다렸다는 듯 다시 소란스워졌다. 미쳤나봐, 진짜 어이없어 등 높은 소리가 오가는 가운데, 베니는 흥미롭단 얼굴로 자신의 턱끝을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