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 2018. 11. 2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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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는 조용했다. 아이의 발소리를 제외하면 C반과 B반을 지나갈 때야 작게 울려퍼지는 조근조근한 말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왕국에 마법학교를 세운지 50년이 넘어간 후 부터 극도로 예민해진 왕이 왕궁 내 인원을 줄이고 궁 내에서 교양없이 떠들거나 소란을 일으키는 자에게 엄벌을 내린다는 말이 나돌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아이는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이 조용한 복도에 자신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존재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아이는 생각했다. 도망치는 곳 또한 왕궁을 벗어나는 건 아니였으나 꼭 자신에게만 보이는 것처럼 아무도 찾지 않고 정리되지 않은 장소가 너무나도 간절했다. 뭐 하나 바뀌지 않는 장소. 그곳에 문을 열고 들어가서야 아이는 자기가 쉬지 않고 뛰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가만히 멈춰서서 숨을 몰아쉬다가 세월과 먼지가 진하게 쌓여 자주빛으로 변해버린 카펫바닥에 주저앉아서, 아이는 아직 떨리는 손으로 인형을 꼭 붙들어 안고 몸을 웅크리듯 숙였다. 둥글게 말린 작은 등이 숨을 곳 없이 숨은 것 처럼 울거나 화내는 일 없이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꼭 그대로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천천히 눈을 뜬 아이는 조금씩, 기어가듯 가까운 책장쪽으로 움직였다. 푹신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것처럼 아이는 처음 만난 인형을 손에서 놓지도 않고 꼭 끌어안은 채로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 찾았다."



아이의 등 뒤에는 푹신한 의자의 등받이 대신 따뜻한 담요처럼 아이를 감싸안은 커다란 남자가 있었다. 



"드디어 찾았어. … … 보고 싶었어요, 한델… ."



새카만 머리카락에 아이의 인형과 묘하게 닮은 푸른색 눈을 한 남자가 아이의 쏟아진 머리칼을 찬찬히 손으로 쓸어넘기었다. 남자는 아이를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이상하리만치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의 얼굴을 새기듯 바라보다가 자꾸만 모로 기우는 아이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자연스레 받쳤다. 기울린 아이의 머리가 남자의 목아래로 움츠리며 파고들자 남자는 아이가 조금 더 편히 잠들 도록 누이듯 다리를 펴주었다. 



"… … ."



남자는 발목까지 축, 늘어진 아이의 스타킹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찌됐든 그 모습이 묘하게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남자는 말 없이 스타킹을 무릎까지 올려주고는 여전히 아이를 끌어안은 채 자신을 쏙 빼다박은 인형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네가 먼저 찾을 줄이야. 거기다 이렇게 도움까지 받을 줄은… 미쳐 몰랐군. … … 사실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어. 당분간만 더 신경을 써줬으면 해. …아직 할일이 남았거든."



남자는 아이의 손에 들린 인형이 제법 기특했는지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손을 뻗었다. 순간 인형의 팔이 됐다는 듯, 필요없다는 듯. 혹은 기분 나쁘다는 듯 남자의 손을 툭 쳐냈다. 



"… … 어디가 날 닮았단 건지…" 



미간을 찌푸린 남자가 말했다.



"흠… 자세히 보니 하나도 닮지 않았군."










"이제 일어날 시간이에요. 한델."



남자가 아이의 머리를 부드러이 쓰다듬고는 그 가느다란 머리칼에 아프도록 간결한 키스를 남기었다.



"…으음,"



아이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가자 남자는 인형과 아이만 남기고 마법처럼 사라졌다.









"너 진짜 미쳤어?! 제 정신이야? 지금, 지금 뭘 하겠다고?"


"한델을 찾아낼거야." 



녹색의 칠이 군데 군데 벗겨진 오래된 벽난로에선 장작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벽난로와 마친가지로 세월에 낡은 카페트 위에 긴 그림자 하나와 그보다 조금 작은 그림자 하나가 일방적인 말다툼을 이어갔다.



"키스야, 키스 해밀턴! … … 정신 차려, 한델은 이제 여기 없어. 죽ㅇ… … 생이… 끝났다고. 좀 이르긴 했지만,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알고 있었잖아!"


"…약속 했어. 그러니까 난 찾으러 갈 거야."


"약속이라니, 무슨 약속?"


"내가 그를 찾을 거야. …슬러 네 도움이 필요해."



슬러 A. 심포니가 자신의 미간 사이를 손가락으로 꾹 꾹 누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애써 진정시켜보려했다. 몇년 전, 이상하리만치 조용히 넘어간 부고가 이렇게 다시 돌아올 줄은 미쳐 몰랐을 것이다.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의 입에서, 12월 한겨울, 오밤중에 말이다.



"… … 너, 내가 그걸 도와줄 거라 생각해?"


"…응."


"내가 내 친구 죽으러 가는 길을 도와 줄거라고?! 그건 자살 행위야!! 날 그정도로 밖에 안봤다니… 실망이다, 키스 해밀턴. … … 내 집에서 나가. … 다시 미국으로 가던가."



타닥 타닥 장작타는 소리만 넓은 거실에 조용히 울렸다. 이만저만 복잡한 표정으로 슬러가 애써 고개를 돌리는 반면, 키스 본인은 또렷이 슬러를 바라볼 뿐이었다.


"… … 슬러… ."


"… … ."


"네가 생각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날 도와줘. …부탁이야."


"… … 한델이 이런다고 기뻐 할 것 같아?! 네가 죽을지고 모르는 일을 하고 있는 게?!"


"… … ."



한다는 사람은 키스인데 정작 울것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슬러였다. 죽은 사람을 찾으러 간다 함은 평행세계로 넘어가거나, 이계로 넘어가거나, 아니면 둘 다 실패해서 죽어서 만나거나 보통 이 세가지 인데, 몇 명 붙들고 시도를 해도 어려운 일을 이대로 혼자 보낸다면 끝끝내 마지막 방법이 가장 유력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부탁하는 그가 이 일을 쉽게 포기할 리 없을테니까. 



"난! 정말… …, 어후!!!"


"… … 너, 진짜, 나한테 잘해! 이거 평생치 이자야!! 말 해두지만, 갚을 수 있단 생각 자체를 버려! 알겠어?!"


"알겠어."


"알긴 뭘 알아!"



큰소리가 잦아들고 거실에는 제법 진지한 말소리가 길게, 그날 영국에 밤새 내린 눈보다 더 길게 오갔다. …두고보자 키스 해밀턴. 슬러가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얼마나 잔거지?"



몽롱함이 채 가시지 않은 아이가 눈을 깜빡이곤 쭈뼛 몸을 세웠다. 시간이, 지금 몇시지? 아이는 자신의 주머니에 시계가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부리나케 인형과 인형의 수첩을 챙겨 도서관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두워진 왕궁 안에는 국왕의 식사시간이 끝나면 켜지는 파란 불꽃의 등불이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몸이 아무리 나른해도 기껏 15분 정도를 꾸벅 조는 아이인데 그 지하 도서관에서 2시간 이상을 푹 잠들었다는 사실이 아이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거기다 딱딱한 책장에 기대어 잠들었던 것 치고 몸이 뻐근하다던가, 불편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는 게 아이의 의문을 더욱 깊어지게 만들었다.



"… 따뜻… 했어."


서늘한 지하 도서관에서 따스한 온기를 느끼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왕궁에 친구나 변변한 지인이 없는 아이에겐 말이다. 



"… 여기 서서 뭐하니?"


"… ?!"



아이가 깜짝놀라 고개를 들었다.



"생각 중인데 내가 방해한 건가?"


"아! 그, 그…게…"



까만 머리의 남자가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이보다 한뼘정도 커다란, 얼굴에 주근깨가 잔뜩 박힌 남자는 손에 쥔 얇은 책 두권을 자신의 어깨에 올리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뭘 하든 상관 없지만 밤늦게 우리가 소환되는 일은 없게 해줄래?"


"… …네?"


"사고 칠거면 통금 이전에 치라는 말이야. 지금…이… 7시 좀 넘었으니까, 8시까지 한시간도 안 남았네."


"아! 감사합니다…!"



아직 시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남자에게 얼른 인사를 마치고 아이는 서둘러 왕궁 서쪽 복도 끝으로 달려갔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아이의 뒷모습은 부지런히 작아지고 있었다.



"… 대체 뭐가 감사한 거지?"




주근깨 많은 남자가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듯, 컴컴한 복도 가운데 홀로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