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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s the blue/왕실 마법학교.

3.

Cur 2018. 12. 16. 00:00




◆ ◆ ◆

◆◆




왕궁의 서쪽 복도 끝에는 기숙사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나선 계단이 있었다. 이는 왕궁 사람들 중에서도 아주 소수만 알고 있는 사실로, 평소에는 오래된 나무의자 하나와 커다란 베이지색 커튼이 그려진 유화그림이 멋들어진 나뭇잎 장식이 새겨진 액자에 걸려있을 뿐, 작은 생쥐 한 마리 지나갈 구멍조차 없는 평평한 벽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곧장 복도 끝을 내달리던 아이는 그 커다란 유화그림 앞에 멈춰 서서 천천히 숨을 고르다가 품에서 하얗고 긴 막대기 하나를 꺼내었는데, 하늘색 손잡이 부분에 줄기가 올라가듯 금색 장식이 양각으로 튀어나와있었다. 아이는 막대기를 살짝 그러쥐고 그 끝으로 그림에 드리워진 커튼을 천천히 들춰냈다. 그러자 유화 속 그림이 막대기 끝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이더니 뒤에 감춰진 푸른 납색의 나선계단 입구가 서서히, 마치 원래 왕궁의 일부였던 것처럼 드러났다. 물론 유화의 모습으로. 아이는 서스럼없이 유화 속 계단에 한발을 내딛었다.



계단은 왕궁과는 별개의 층수로 설계된 모양이었다. 왕궁 내 계단을 오를 때보다 한 층을 올라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첫번째 층의 입구를 지나쳐 두번째 층을 오를 때 쯤 아이의 이마엔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었다.



"자, 자, 샛노란 꼬맹이들! 얼른 나와서 문 앞에 서라. 끝내고 나도 쉬어야지."



두번째 층에 도착하자 기숙사 관리인인 쟝이 낮게 박수를 치며 너른 기숙사 복도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연한 하늘색 카펫트가 길게 깔린 기숙사의 복도는 음산한 기운까지 느껴지는 나선계단과 달리, 깨끗한 흰 벽에 기숙사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유화그림의 액자 틀과 같은 모양의 몰딩이 금색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이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진 문 앞에 각자 서서 서로 이야기를 하거나 하품을 하는 등, 쟝이 인원수를 확인 할 때까지 비교적 자유롭게 서 있었다.


 

"거기, 늦게 들어온 꼬맹이 둘! 얼른 문 앞에 가서 서라."



쟝이 뒤를 돌아 아이와, 아이를 뒤따라 들어온 또 다른 아이를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어찌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아이의 뒤에서 계속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아이의 머리는 아주 진한 금발이었는데 언뜻 보면 갈색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인형을 들고 있던 아이가 기숙사 복도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자신의 방 앞에 섰을 땐 맞은편에 있던 베니가 싱긋 웃으며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샤이? 저녁 식사까지 거를 정도로… 혼자서 좋은 저녁 보냈어?"


"… … ."


"아! 혼자가 아니구나? 그 이상한 인형이랑 같이 보냈을 테니까."



그 말을 들었는지 베니의 옆에 선 아이가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뭔데? 왜 웃어? 하고 묻는 또 그 옆에 아이에게 그 아이는 또 그 옆에 아이에게 서로 작게 속닥거리며 키득거리었다. 정작 말을 한 베니는 그런 반응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아이의 대답을 기다리듯 여전히 아이를 쳐다볼 뿐이었다.



"저… 한테… 신경쓰지, 말아주셨…으면 하는…데요… ."



아이가 작지만 또박또박 얘기했다.



"왜?"


"… … ."


"그런 거 말고 진짜 친구, 갖고 싶지 않아?"



아이는 말없이 인형을 들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뭣 하면… 내가 해줄 수 도 있는데, 어때?"



그 말에 웃으며 흥미롭다는 듯 둘을 쳐다보던 아이들이 일제히 눈이 동그래졌다.



"뭐?! 베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 제가… 왜요?"



베니를 똑바로 바라본 아이가 말했다.



"제가 왜… 당신과 친구를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당신 같은 친구를 바란 적 없어요. 저…는 이 아이면, 충분해요."


"… 너는, "




-짝!




웃고 있던 베니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고,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떼는 순간, 복도에 귀를 찢는 마찰음이 크게 울려 퍼졌다.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은 계단으로 나가는 복도의 끝자락이었다. 



"어디, 어디 니까짓 게 나한테 손을 대! 하등 쓸모없는 감시꾼 주제에…!"



진한 금발의 아이가 품속에 갈색 가죽으로 쌓인 무언가를 꼭 쥐고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쟝의 손을 어찌나 세게 내쳤는지, 쟝의 손등은 손톱에 긁혀 피가 고여 있었다. 



"이런… 거 참 몰라 봬서 죄송하게 됐습니다만… , 자리에 좀 서주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가야할 곳이 많아서."



불쾌하게 표정을 찌푸린 쟝이 영 아니꼽다는 듯 비아냥거리었다.



"… 그리고 이 하등한 감시꾼이… 아래층 선생님들께 보고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주세요."



쟝에 말이 끝나자 아이는 무섭도록 쟝을 노려보고는 자신의 방에 휙 하니 들어가 버렸다.



"인원파악 끝, 모두 방에 들에가 문 잠가라. 좋은 꿈꾸고."


"잘 자, 샤이-. 좋은 꿈 꿔."



베니가 아이를 다정히도 길게 늘려 불렀다. 아이는 베니의 표정이 아주 잠시의 순간 차갑게 일그러진 것을 보았는데 이상하게도 아주 잠깐 사이에 그는 아주 기분이 좋아보였다. 갑작스레 달라진 태도가 그다지 달갑지 않던 아이는 베니의 눈길을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 


 







왕궁 마법학교의 모든 학생들은 입학 후 학년별로 각 층에 기숙사방을 배정받았는데 입학 시 치룬 시험 성적과 소질을 기반으로 방의 위치가 정해졌다. 가장 안쪽, 기숙사 복도 끝 벽부터 기숙사 복도의 시작까지. 학교에는 기숙사에 관한 우스갯소리도 많이 돌았는데, 그중 하나가 기숙사 복도 끝에 가까울수록 마법을 쓰기가 힘들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어차피, 기숙사 문을 닫기 위해선 마법을 쓸 때 사용하는 지팡이를 문손잡이에 꽂아야 하기 때문에 마법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아이가 문을 닫고 작은 잎과 줄기가 동그랗게 말려있는 황금빛 문손잡이에, 기숙사 입구를 열었을 때 사용한 지팡이를 집어넣으니 열쇠가 맞물리듯 모양이 꼭 맞았다. 지팡이가 끼어있는 손잡이를 잡아 돌리자, 철컥, 무언가 잠기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기숙사의 너른 복도를 타고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데, 마치 아주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걸 몇 번이고 덫 잠그는 것 같았다. 쟝은 방문이 모두 닫힌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선계단 가까이에 있는 작은 한 개의 종과 4개의 줄 가까이에 섰다. 



 

-뎅 뎅 뎅




그가 첫 번째 줄을 잡아당기자 어디선가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쟝은 잠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빤히 보다가 계단 쪽으로 천천히 나가더니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구부러진 쇠 지렛대를 힘주어 돌렸는데, 그 기분 나쁜 쇳소리는 아마 온 기숙사에 울렸을 것이라 확신 할 수 있었다. 왜냐면 이는 나선계단 위 천장에서 철창이 내려오는 소리로, 이제 마법학교의 아이들은 모두 꼼짝없이 기숙사에 갇혀있단 걸 고 학년이 있는 층까지 높이 높이 알리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었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확신 할 수 없지만.



"… 오늘, 이상한 일이 너무 많았어."

 


아이가 소매 끝과 카라 끝에 금실이 둘러진 새하얀 잠옷으로 갈아입으며 혼자 중얼거리었다. 방안엔 통금시간이 되기 전, 쟝이 미리 밝혀두었던 촛불들이 구석구석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네 덕분이면 좋겠는데… ."



아이가 책상위에 올려둔 인형을 보며 말했다.



"…우린 친구가… 맞…나요?"



아이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쭈뼛쭈뼛 물었다.



"… …그랬으면 좋겠다."



부끄럼어린 얼굴로 멋쩍게 웃은 아이는 인형을 들어 살풋 끌어 앉고 잘자란 인사를 했다. 책상 위, 가장 밝게 타오르는 촛불에 촛대 옆에 조심스레 세워두고 아이는 참 길았던 하루를 푹신한 침대 위에서 마무리 지었다. 






정말로, 이상할 정도로 길었던 하루였다.















"… 커피, 괜찮아요?"


"반 샷 정도는… 괜찮지 않을 까요…?"



"웬일로 커피를 마시지? 마시는 걸 못 봤는데… 원래 안 마시잖아요."


"그냥… 오늘은… 키스가 좋아하는 걸… 마시고 싶어서요. … … 날은 춥고… 오랜만이니까, 조금 더… 가까이 느끼고 싶고 그래서… 요… ."



"… 굉장히 야하게 들리는데, 그대로 들어도 되나요?"


"그… 음… 그, 그게…"



"나는 한델을 그대로 느끼는 게 좋은데."


"… … 네?"



"우리, 장소를 잘못 잡았나 봐요."


"어디든 좋아서… 아! 그! 어, 어디든 좋다는 게, 어디든, 키스를 바로… 최대한 빨리 볼 수 있는 곳이면 좋아서… 그, 다 다른 게 아니라…!"



기분 좋은 웃음 소리였다. 낮고 다정한 웃음소리가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부드럽게 섞여서 크림처럼 달게 한델에게 녹아들었다. 모카커피 위에 올라간 초코시럽이 무겁게 가라앉는 동안, 키스가 몸을 앞으로 천천히 움직여 방향 잃은 한델의 손 위를 천천히 덮었다. 가볍게 손톱을 세우고 손가락 사이를 긁어내듯 쓸었다가 사이사이를 자신의 손으로 엮어 쥐었다. 굵은 자신의 손가락 마디로 얇고 새하얀 손을 누른 것 뿐 인데 새 빨개지는 얼굴이 매번 새롭다. 한결 같으면서도 이른 세월이 지나간 한델을 보면서 키스가 부러 한껏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공연은 내일도 있으니까… 집으로 갈까요?"


"그…음…,"



"여기선 곤란하잖아. … 솔직히 난 상관없지만요."


"그… 네?"



"대서특필로 기사에 나면, 판권료가 내려갈지, 올라갈지 궁금하지 않아요?"


"지, 집에 가는 게 좋겠…어요… ."



동그란 눈으로 되묻던 한델이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여전히 발그므레한 얼굴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더니 무어라 속삭인 키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그의 입술이 닿은 새하얀 찻잔이, 자신의 볼보다 더 붉은 입술이, 대답을 기다리는 날카롭지만 다정한 눈길이 한델의 마음을 깊이 없이 배고 지나갔다. 



"… 좋아요."



한델이 막 피어난 꽃처럼 웃었다. 여린 잎이 떨리듯 시선을 떨구다가 모른 척 새어나오는 말을 전하였다.






좋아해요. 



사랑해요, 키스. 





나를 대신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나를 기억하는 거니까, 나는 나를 기억해야 해요. 





잊지 말아요. 





똑같이 생긴 남자였다. 다른 건 그의 나이와 옷차림 정도 밖에 없어 아이는 이상하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더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장소, 다른 세상 같은 곳에서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아이와 똑같이 생긴 남자는 곧 끝날 시린 겨울처럼 애처로운 눈에서 똑 똑 눈물을 떨구었다. 눈물은 남자의 눈물 점을 타고 아이의 마음을 지나서 아주 먼 곳으로 떨어졌다. 아이는 그곳에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상한 하루에 이상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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